제1부 ― 소르피갈에서 눈을 뜨다

내 이름은 루나였다.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검을 쥐는 법도 알았다. 방패로 공격을 흘려내는 방법과 갑옷의 끈을 조이는 순서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술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어느 전장에서 싸웠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낯선 방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갈색 돌로 쌓은 벽과 낮은 천장, 밤새 타다 남은 촛불. 창문 밖에서는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상인들의 외침이 들렸다.

침대 곁에는 한 자루의 검이 놓여 있었다.

검집은 오래되어 군데군데 가죽이 벗겨졌고, 손잡이에는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검이라는 사실은 설명할 수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검을 허리에 차고 몸을 일으키자 방 안에 있던 다섯 사람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이름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고, 어째서 같은 방에 모여 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창가에는 가레스가 서 있었다.

넓은 어깨와 단정한 자세, 갑옷 위에 걸친 흰 천.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고 목에는 작은 성표가 걸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팔라딘이라는 사실과 따라야 할 계율은 기억했지만, 어느 신전에서 서약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밖을 확인해 봤어.”

가레스가 말했다.

“이곳은 여관이다. 도시 이름은 소르피갈이라고 하는군.”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그걸 아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야.”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은 계속 성표를 만지고 있었다. 가레스가 불안할 때 보이는 버릇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왜 그런 버릇을 가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문 옆에는 엘프 궁수 실렌이 서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잠에서 깨어난 듯 이미 장비를 갖춘 상태였다. 잿빛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활시위를 점검하면서도, 귀는 복도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쫓고 있었다.

“문밖에 둘, 계단 아래에 셋.”

실렌이 말했다.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어.”

“적은?”

“지금까지는.”

실렌은 짧게 대답하고 다시 활을 살폈다. 그녀가 말을 아끼는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말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방 한쪽에서는 드워프 브람이 작은 가죽 주머니를 뒤집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가느다란 철사와 갈고리, 자물쇠를 여는 도구들이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들어 빛에 비춰보더니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내려놓았다.

“돈은 조금 있고, 식량은 없고, 장비는 형편없군.”

“일어나자마자 돈부터 세었어?”

엘리안의 물음에 브람이 코웃음을 쳤다.

“신께 기도하면 아침밥도 내려오나?”

“적어도 훔쳐 먹으라고 가르치지는 않으시지.”

“아직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 미래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중일 뿐이지.”

성직자 엘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우리 중 가장 평범하고 온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소박한 옷 위에 사슬 갑옷을 걸치고 둥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치료와 보호의 기도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잠시 머뭇거렸다.

신앙은 남았는데 그 신앙을 갖게 된 삶은 사라진 사람의 표정이었다.

마지막 동료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작은 금속 조각을 분해하고 있었다.

노움 마법사 미라였다.

“그건 어디서 났어?”

내가 묻자 미라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침대 아래.”

“뭔데?”

“모르겠어.”

“모르는데 분해하고 있는 거야?”

그제야 미라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모르니까 분해하는 거지.”

가레스가 미간을 좁혔다.

“위험한 물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조심해서 분해하고 있어.”

“방금 불꽃이 튀었는데.”

“작동한다는 뜻이야.”

미라는 금속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작은 체구였지만 눈빛에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여섯 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인간 기사인 나와 팔라딘 가레스.

엘프 궁수 실렌.

드워프 도적 브람.

인간 성직자 엘리안.

노움 마법사 미라.

서로의 이름과 능력, 성격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했던 시간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의 삶에서 시작 부분만 깨끗하게 잘라낸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브람이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내가 대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들을 지휘했던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도 다섯 사람은 자연스럽게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낯선 도시였지만 방 안에만 머문다고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우선 도시를 살펴보자.”

내가 말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식량과 장비는 필요해.”

가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렌은 이미 문을 열고 복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브람은 바닥에 펼쳐둔 도구들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다.

“좋아. 하지만 가진 돈을 전부 정직하게 쓸 필요는 없다는 점도 기억해두자고.”

“브람.”

가레스가 낮게 불렀다.

“가능성을 검토한다고 했잖아.”

엘리안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준비를 했고, 미라는 조금 전 발견한 금속 조각을 다시 꺼내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과거는 기억나지 않아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조용한 여행은 되지 않을 것이다.


여관을 나서자 소르피갈의 거리가 펼쳐졌다.

도시는 높고 거친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폭이 좁은 길이 복잡하게 갈라졌고, 건물들은 성벽에 기대듯 붙어 있었다. 시장에서는 말린 고기와 식량을 팔았고, 대장간에서는 쇠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험가를 위한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상처와 질병을 치료하는 신전.

무기와 갑옷을 파는 상점.

경험을 쌓은 자를 훈련시키는 훈련소.

돈만 있다면 필요한 것은 대부분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우리에게 돈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브람은 상점에 걸린 갑옷의 가격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저걸 사려면 지금 가진 돈의 열 배는 필요하겠는데.”

“무리해서 살 필요는 없어.”

가레스가 말했다.

“지금 장비로도 약한 적은 상대할 수 있다.”

브람이 그의 낡은 방패를 두드렸다.

“그 방패는 적보다 먼저 쓰러질 것 같은데.”

“그때 네가 앞에 서면 되겠군.”

“팔라딘의 용맹함을 빼앗을 수는 없지.”

그들이 말다툼하는 동안 실렌이 걸음을 멈췄다.

“조용히 해.”

그녀의 시선은 길 모퉁이의 어두운 골목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가 움직였다.

나는 검을 뽑았다.

가레스가 방패를 들고 내 옆에 섰다. 엘리안은 성표를 움켜쥐었고, 미라는 손가락 사이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냈다. 실렌은 이미 활시위를 당긴 상태였다.

브람만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나만 보는 거지? 나는 원래 뒤에서 싸우는 사람이야.”

골목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크기였지만 몸은 뒤틀려 있었고, 녹슨 무기를 들고 있었다.

첫 번째 괴물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나는 방패로 공격을 밀어낸 뒤 검을 휘둘렀다. 날이 괴물의 몸을 갈랐지만 완전히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가레스가 옆에서 두 번째 공격을 막았다.

“루나, 왼쪽!”

실렌의 화살이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가 괴물의 목에 박혔다.

미라가 만들어낸 불꽃이 다른 괴물의 얼굴에서 터졌다. 놈이 비틀거리는 사이 브람이 뒤로 돌아가 다리를 베었다.

“뒤에서 싸운다더니?”

엘리안이 물었다.

“저놈을 기준으로 뒤쪽이었어.”

마지막 괴물이 가레스의 방패를 밀어내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가레스가 중심을 잃는 순간 나는 놈의 옆구리를 찔렀다.

괴물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전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무기를 내리지 않았다.

실렌이 주변을 확인하고서야 활을 낮췄다.

엘리안은 가레스의 팔에 생긴 상처 위에 손을 올렸다. 희미한 빛과 함께 피가 멎었다.

기억은 없어도 우리의 기술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반갑기보다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정말 처음 함께 싸운 것일까?


쓰러진 괴물들은 금화 몇 닢을 가지고 있었다.

브람이 능숙하게 전리품을 정리했다.

“이 정도면 식량은 살 수 있겠군.”

가레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막지는 않았다. 죽은 괴물에게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도시를 계속 탐색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지도에 선을 그었다. 나는 거리의 모양을, 실렌은 위험한 장소를 기록했다. 브람은 잠긴 문과 수상한 벽을 표시했고, 미라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자와 문양을 베껴 적었다.

소르피갈에는 여덟 개의 조각상이 있었다.

각 조각상에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물과 땅, 하늘과 모래에 사는 괴물들. 그것들을 쓰러뜨린 자에게 행운이 따른다는 말. 아직 본 적 없는 도시와 성, 산맥과 섬에 관한 암시.

미라는 조각상의 문자를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누군가 일부러 세계 곳곳으로 사람을 보내려는 것 같아.”

“무슨 뜻이지?”

“이건 기념비가 아니야. 지시문에 가까워.”

가레스가 말했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 우연히 기억을 잃은 모험가 여섯 명이 수수께끼로 가득한 도시에서 함께 눈을 뜬 것도 우연일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각상의 문장을 모두 기록했다.

지금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계를 계속 여행한다면 언젠가 문장 속 장소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때 이 기록이 길을 보여줄지도 몰랐다.


브람은 벽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걷다가 자주 멈춰 돌 사이의 틈을 살피고 손잡이로 벽을 두드렸다.

“도시 구경이 아니라 돌 감상을 나온 건가?”

가레스가 물었다.

“벽을 믿지 않는 편이라서.”

“벽이 널 속이기라도 하나?”

“정직한 벽은 이렇게 텅 빈 소리를 내지 않지.”

브람이 돌 하나를 세게 밀었다.

벽 일부가 뒤로 들어가더니 옆으로 움직였다. 그 너머에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가레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브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과는 필요 없어.”

“한 적 없다.”

“그러면 다음 벽도 내가 보지.”

숨겨진 통로는 도시의 다른 골목으로 이어졌다. 보이는 길만 따라다녔다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장소였다.

미라는 움직인 돌벽의 구조를 살폈다.

“마법의 흔적이 없어.”

“그럼 사람이 만들었다는 뜻이야?”

“아마도. 그런데 아주 오래됐어.”

소르피갈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복잡했다.

벽 뒤에 길이 있었고, 평범한 골목 끝에는 괴물이 기다렸다. 조각상은 먼 세계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도시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누구도 우리에게 임무를 주지 않았다.

왕의 부름도 없었고, 구해야 할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을 잃었다고 말해도 술에 취한 모험가를 보는 듯한 눈빛만 보냈다.

이 세계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답을 찾아야 했다.


도시의 남동쪽을 탐색하던 중 실렌이 멈춰 섰다.

“아래에서 바람이 올라와.”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런 표지도, 경고문도 없었다. 계단은 도시의 건물 사이에 숨겨져 있었고, 아래쪽은 햇빛이 닿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브람이 횃불에 불을 붙여 계단 아래로 던졌다.

횃불은 몇 차례 돌계단에 부딪친 뒤 보이지 않는 곳에 떨어졌다. 희미한 불빛이 아래쪽 벽을 비추었다.

“제법 깊군.”

가레스가 말했다.

엘리안은 계단 앞에 남은 오래된 발자국을 살폈다.

“내려간 사람은 많아 보여. 올라온 흔적은 그보다 적고.”

“그런 말은 내려가기 전에 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브람이 중얼거렸다.

미라는 계단 벽에 새겨진 작은 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래에 무언가 있어.”

“그건 우리도 알아.”

“아니, 바람 소리 말고 다른 소리가 들려.”

우리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낮은 마찰음이 들렸다. 돌을 긁는 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가 아주 멀리서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계단 아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줄 단서가 저곳에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괴물과 함정밖에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밝은 거리에서는 아무런 답도 찾지 못했다.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 뒤에 숨어 있었다.

“장비를 확인해.”

내가 말했다.

가레스가 방패를 들었다.

실렌은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엘리안은 성표를 쥐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미라는 손바닥 위에 빛을 만들어냈고, 브람은 도구가 든 주머니를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먼저 내려갈게.”

“혼자 앞서지 마.”

가레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선두는 둘이 서는 편이 안전하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란히 첫 계단을 내려갔다.

뒤이어 네 사람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몇 걸음 지나자 소르피갈의 햇빛이 머리 위에서 가느다란 선으로 변했다. 다시 몇 걸음을 내려가자 그 빛마저 사라졌다.

미라가 만든 작은 빛만이 우리 여섯 명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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