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 두 번째 블랙리지
에를리퀸으로 돌아온 우리는 하루를 꼬박 쉬었다.
사원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훈련소에서 그동안 쌓은 경험을 몸에 익혔다. 식량을 채우고 망가진 장비도 손질했다. 해커 경이 요구한 울프스베인을 구할 방법을 물어보았지만, 에를리퀸의 상인들은 취급하지 않는 물건이라고 했다.
약초에 밝은 엘리안도 고개를 저었다.
“울프스베인은 독성이 강한 식물입니다.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조금만 양을 잘못 맞추면 심장을 멎게 할 수 있어요.”
브람이 말했다.
“마늘 다음에는 독초라. 그 영주가 만드는 게 요리인지 독약인지 모르겠군.”
“재료가 앞으로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
미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해커 경의 솥에서 느껴진 힘은 평범한 연금술이 아니었어. 그 사람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완성되도록 도와도 괜찮은지는 생각해봐야 해.”
그 말에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울프스베인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에를리퀸으로 돌아오는 동안 북쪽 숲 너머에서 또 하나의 성을 보았다. 남부 성의 병사가 말했던 블랙리지 북부 성일 것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성.
서로 다른 영주.
남부 성에서 은빛 문장 C를 발견한 이상, 북부 성에도 또 다른 문장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북쪽으로 향했다.
블랙리지 북부 성은 남부 성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멀리서 보면 어느 성을 먼저 방문했는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검은 돌로 쌓은 높은 성벽과 모서리의 망루, 성문 위에서 나부끼는 어두운 깃발까지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미묘한 차이가 보였다.
남부 성의 벽에는 칼과 창에 긁힌 자국이 많았지만, 이곳의 성벽은 비교적 깨끗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갑옷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병사에게 상인의 통행증을 내밀었다.
그는 금속패를 확인한 뒤 우리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남부 성에도 다녀왔군.”
질문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브람이 물었다.
병사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 통행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곳의 주인은 인스펙트론 경이시다. 해커 경의 성과 같은 태도를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두 영주의 관계는 어떻지?”
내가 물었다.
병사의 얼굴이 굳었다.
“방문자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주인들의 일에 관해서 질문할 권리까지 얻은 것은 아니다.”
성문이 열렸다.
우리는 더 묻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 들어서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복도를 전에 걸어본 것만 같았다.
중앙 통로와 양쪽의 방, 벽에 걸린 검은 방패,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횃불. 남부 성과 거의 같은 구조였다.
브람이 문 하나를 열어본 뒤 말했다.
“이 방도 똑같아.”
“우리가 남부 성으로 잘못 돌아온 건 아니겠지?”
미라가 농담처럼 물었다.
실렌은 뒤를 돌아 성문 방향을 확인했다.
“방향이 달라.”
그녀는 우리가 그린 지도를 펼쳤다.
“남부 성과 똑같이 생겼지만, 전체 구조가 돌아가 있어. 방과 통로의 배치는 비슷해도 향하는 방향은 달라.”
나는 지도 위에 새 선을 그었다.
두 성을 지은 사람이 같았거나, 하나의 설계도를 그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성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남부 성에는 빈 금고와 경보가 가득했고, 곳곳에서 적들이 튀어나왔다. 북부 성은 훨씬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편할 정도였다.
“사람이 살고 있는 성 같지 않군.”
가레스가 말했다.
“숨어서 보고 있을 수도 있어.”
실렌의 손은 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걸었지만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열어본 방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방금까지 머물렀던 흔적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횃불은 타고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성은 관리되고 있었다.
다만 관리하는 자들이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첫 번째 전투는 성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뒤에 일어났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갑옷을 입은 전사들과 기묘한 짐승들이 길을 막았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우리가 조금 전 확인했던 빈방 쪽이었다.
“뒤쪽도 온다!”
실렌이 외쳤다.
우리가 지나온 복도에서도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부 성보다 적과 마주치는 횟수는 적었지만, 일단 나타난 적들은 훨씬 집요했다. 도망칠 길을 막고 앞뒤에서 동시에 밀어붙였다.
가레스와 내가 양쪽 통로를 나누어 막았다.
“미라, 뒤쪽을!”
미라가 주문을 외우자 좁은 복도에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바닥에 서리가 번지며 적들의 발이 얼어붙었다. 브람이 그들 사이를 파고들어 무기를 떨어뜨렸고, 실렌의 화살이 어둠을 갈랐다.
내 방패에 연달아 두 번의 충격이 전해졌다.
나는 앞으로 몸을 밀어 적 하나를 벽에 몰아붙인 뒤 검을 찔렀다. 가레스가 내 옆을 지키며 다른 적의 공격을 받아냈다.
전투가 끝난 뒤에도 복도는 다시 고요해지지 않았다.
멀리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움직여야 해.”
내가 말했다.
“이곳에서는 오래 머물수록 포위될 거야.”
우리는 상처를 급히 치료하고 탐색을 계속했다.
동쪽의 작은 방에서 두 번째 은빛 문장을 발견했다.
벽 한가운데에 금속처럼 빛나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ATIS-19-31UD54AEUPI1
미라가 남부 성에서 베껴온 문장을 꺼냈다.
IACI1-20NU–G,NOT2
두 문장을 나란히 놓아보았지만, 당장 이어지는 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A야.”
미라가 말했다.
“남부 성에서 찾은 것은 C였지. 그렇다면 역시 B가 어딘가에 있어.”
“순서대로 붙이면 읽을 수 있을까?”
엘리안이 물었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거야. 글자가 뒤섞였거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자리를 바꿔야 할지도 몰라.”
브람이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내 눈에는 술 취한 사람이 숫자까지 섞어서 낙서한 것처럼 보이는데.”
“술 취한 사람이 두 성에 나누어 같은 방식으로 낙서를 남기지는 않아.”
미라는 종이를 소중하게 접었다.
“누군가 일부러 나눈 거야. 세 문장을 전부 찾기 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도록.”
나는 지도에 장소를 표시했다.
은빛 문장 A와 C.
남은 것은 B였다.
그리고 이 세계 어딘가에 그 세 문장을 읽을 방법도 있을 것이다.
성 아래쪽 방에서는 또 한 명의 포로를 발견했다.
남부 성의 포로처럼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손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우리가 다가가자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도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브람.”
그가 자물쇠 앞에 앉았다.
그러나 실렌이 방문을 지키며 말했다.
“또 함정일 수도 있어.”
“알아.”
나는 포로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확인해야 해.”
브람이 족쇄를 풀어내는 동안 엘리안이 물과 식량을 건넸다. 포로는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지 않은 채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누가 당신을 가뒀죠?”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스펙트론 경입니까?”
포로의 몸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족쇄가 풀리자 그는 벽을 짚고 일어섰다.
“남부 성에서도 당신처럼 갇힌 사람을 봤어요.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포로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길을 비켜주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몇 걸음 뒤에서 우리가 따라갔지만, 모퉁이를 돈 순간 모습이 사라졌다.
갈림길도, 숨을 방도 없는 복도였다.
“어디로 간 거지?”
가레스가 주변을 살폈다.
미라는 포로가 사라진 벽에 손을 댔다.
“마법의 흔적은 없어.”
브람이 바닥을 살펴보았다.
“발자국도 여기서 끝났어.”
두 성의 포로들이 누구인지, 왜 모두 같은 모습으로 갇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그들을 구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풀어놓아서는 안 될 무언가를 풀어준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중앙 깊숙한 곳에는 인스펙트론 경의 알현실이 있었다.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상인의 통행증을 확인한 뒤 우리를 들여보냈다.
남부 성의 알현실과는 완전히 달랐다.
벽에는 지도와 오래된 문서가 걸려 있었고, 탁자 위에는 깨진 석상과 토기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낡은 동전과 알아볼 수 없는 문자판이 보관되어 있었다.
방 중앙에는 마른 체격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과 날카로운 눈매. 그는 우리가 들어와도 인사를 건네지 않고, 내 갑옷에 묻은 흙과 가레스의 검, 미라가 들고 있는 지도부터 살폈다.
“여행자들이군.”
그가 말했다.
“어디에서 왔지?”
“소르피갈에서 시작했습니다.”
“C-2에서 출발해 C-1을 지나 B-1까지 왔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주변의 길도 어느 정도 조사했겠지.”
그는 우리의 지도에 관심을 보였다.
“당신이 인스펙트론 경입니까?”
“그렇다.”
그는 탁자 위의 부서진 석판을 내려놓았다.
“나는 병사를 원하지 않는다. 싸움만 할 줄 아는 자도 필요 없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찾아내고,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탐험가들이다.”
미라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가르나 해커 경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흥미였다.
“무엇을 찾고 계시죠?”
그가 대답하려는 순간, 그의 시선이 내 허리춤에 머물렀다.
해커 경이 준 작은 표식이 매달려 있었다. 울프스베인을 가져오라는 의뢰를 받아들였을 때 병사가 건네준 증표였다.
인스펙트론 경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다른 영주의 일을 맡았군.”
“블랙리지 남부 성의 해커 경이 울프스베인을 요구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의뢰를 받을 수 없다.”
“두 가지 일을 함께 처리하면 안 됩니까?”
내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 영주의 명을 받은 자가 다른 영주의 명까지 받으면 어느 임무를 우선하겠나? 두 주인이 상반된 것을 요구한다면 누구를 배신할 셈이지?”
“우리는 누구의 신하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는 더 이상의 대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해커의 임무를 끝내거나 포기한 뒤 다시 오라. 그때까지 내 일은 맡길 수 없다.”
가레스가 반박하려 했지만, 나는 그를 막았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알현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브람이 낮게 말했다.
“남쪽 영주는 독초를 가져오라 하고, 북쪽 영주는 한 사람만 섬기라고 하는군. 영주들을 만날수록 자유가 줄어드는 기분이야.”
“그래도 중요한 사실을 알았어요.”
엘리안이 말했다.
“인스펙트론 경은 미지의 장소를 찾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시 오면 이 세계의 숨겨진 곳들을 알려줄지도 몰라요.”
나는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반드시 다시 와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울프스베인을 찾아 해커 경의 의뢰를 마치거나, 그 임무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성을 거의 다 살폈을 무렵, 우리는 바닥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통로를 발견했다.
남부 성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구조였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미끄럼 통로.
하지만 이번에는 통로 주변 벽에 희미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나무들이 휘어지고, 그 아래에 작은 건물이 묻혀 있는 모습이었다.
미라가 그림을 손으로 훑었다.
“숲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성을 나갈 지름길일 수도 있겠군.”
가레스가 말했다.
브람은 작은 돌을 통로에 굴렸다.
돌이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반대편에서 걸어 올라오기는 어렵겠어.”
“남부 성에서는 내려가지 않았지.”
실렌이 말했다.
“이번에도 위치만 적고 돌아가는 게 안전해.”
그 말이 옳았다.
하지만 B-1을 탐색할 때 갈 수 없었던 지역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산과 숲에 둘러싸여 어떤 방향에서도 들어갈 수 없었던 땅.
두 성의 미끄럼 통로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해가 지기까지는 시간이 남았어.”
나는 통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여섯이 함께 내려간다. 도착한 뒤 돌아올 길이 없다면 다른 출구를 찾는다.”
가레스가 먼저 방패를 등에 고정했다.
“내가 앞에 가겠다.”
“아니.”
나는 그보다 먼저 통로 앞에 섰다.
“결정한 사람이 먼저 가야지.”
“루나답군.”
브람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심호흡한 뒤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돌바닥이 갑자기 아래로 꺼졌다.
가속이 붙으면서 벽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손을 뻗어 멈추려 했지만 잡을 곳이 없었다. 몇 차례 몸이 벽에 부딪힌 뒤, 통로 끝에서 밝은 빛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몸이 젖은 흙 위를 굴렀다.
잠시 후 가레스와 실렌, 브람, 엘리안, 미라가 차례로 떨어졌다. 비명과 욕설, 장비가 부딪히는 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모두 무사해?”
내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사의 기준부터 정해줘.”
브람이 진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대답했다.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나온 통로는 높은 절벽 중간에서 끝나 있었다. 다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주변은 B-1의 다른 숲과 달랐다.
나무들은 바람도 없는데 끊임없이 떨렸고, 땅 아래에서는 낮은 진동이 전해졌다. 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불안한 속삭임 같은 소리를 냈다.
미라가 방향을 확인하려고 주문을 외웠다.
“우리가 전에 접근하지 못했던 곳이야.”
그녀가 말했다.
“사방이 절벽과 빽빽한 숲으로 막혀 있어. 방금 통로가 아니었다면 들어올 수 없었을 거야.”
나는 지도를 꺼내 현재 위치를 표시했다.
그때 실렌이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춰 세웠다.
“앞에 무언가 있어.”
나무 사이로 오래된 석조 건물이 보였다.
절반 이상이 땅속에 묻혀 있었고, 입구에는 부서진 기둥들이 쓰러져 있었다. 건물 위로 자란 나무뿌리가 벽을 휘감고 있었다.
폐허처럼 보였지만 완전히 버려진 곳은 아니었다.
입구 앞의 흙에는 최근 생긴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람의 것이었다.
그러나 발자국의 방향은 이상했다.
모든 자국이 건물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가레스가 검을 뽑았다.
“돌아갈 길은 없군.”
나도 검을 빼 들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는 수밖에.”
우리는 떨리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 석조 건물의 입구로 향했다.
그 아래에서 차갑고 오래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마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우리의 도착을 알아차리고, 처음으로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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